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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받은 글)

‘동무생각(思友); 청라언덕 위의 첫사랑

- 서 호련

푸를 청(靑), 담쟁이 라(蘿) 자를 써서 '푸른 담쟁이덩굴'이란 뜻을 가진

'청라언덕'은 당시 박태준이 다니던 대구 계성학교의 아담스관과 맥퍼슨관,

그리고 언덕에 위치한 동산의료원 선교사 사택들이 푸른 담쟁이덩굴로 휘감겨 있는

모습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동무생각’의 배경이 된 대구 동산동의 ‘청라언덕’은 대구 근대문화의 중심지다.

코로나 바이러스 환자 치료로 유명한 대구의 계명대 동산 병원이 바로 이곳

동산의료원이다.

박태준은 우리나라 현대음악의 선구자로서 1920년 동요 ‘기럭기럭 기럭이...’ 라는 ‘기러기’, 1925년 ‘24세의 나이에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의 ‘오빠생각’,

새나라의 어린이 등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동요를 작곡했고, 1922년 그가 작곡한

우리나라 첫 가곡인 ‘동무생각(思友)’의 노랫말이 바로 이 언덕 위의 돌비에 새겨져 있다.

마산 창신학교 설립자의 아들이자, 창신학교 국어교사로 있던 노산 이은상은

1년 전 이 학교로 부임한 태준이 지은 동요를 좋아했다.

태준은 은상과 함께 노비산 언덕에서 바라보는 월포의 일몰을 좋아했고,

노마산에서 구마산으로 가는 다리 위에서 삶과 예술에 대한 이야기로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은상은 푸른 담쟁이 가득한 청라언덕과 좁고 긴 90계단이 아름다운 태준의 고향

이야기를 좋아했다.

태준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은상은 꿈결 같은 표정을 지으며 말하곤 했다.

“박 선생님의 이야기는 언제나 고운 시처럼 아름답습니다.”

그날도 태준은 은상과 함께 노비산 언덕에 앉아 있었다.

암울한 조국의 현실이 둘의 마음을 더욱 어둡게 하였다.

침울한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문득 은상이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그런데 박 선생님, 선생님의 첫사랑은 어떤 분이셨나요?”라고 물었다.

은상의 뜬금없는 질문에 태준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첫사랑은 뭐, 한번 제대로 이야기도 못했는걸요.“

"첫사랑이 다 그렇지요. 그러니까 영영 가슴속에 박제되는 사랑이고요.”

“제가 다니던 계성학교 가까이에 있는 신명여고의 여학생이었어요.

함께 교회에 다녔는데, 한 번은 그 여학생이 자두를 한 바구니 가져와 교회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어요.

전 그 자두가 저한테까지 올까 하며 가슴을 졸이며 있었지요.

그러다가 결국 화장실로 달아나 버렸어요.

혹시 자두를 못 받게 된다면 내가 자리에 없었으니 주지 못했을 거라

위안하려고요.

그 후 돌아오니 오르간 위에 자두 두 알이 놓여 있었어요.

깨끗한 손수건이 자두 위에 덮여 있었지요.

그 자두를 한참 책상 위에 두고 날마다 바라보았어요.

더는 둘 수 없을 만큼 썩고 말라버렸을 땐

꼭지를 따서 그 꼭지를 습자지에 싸서 보관했지요.”

"교회로 가려면 청라언덕을 지나가야 했어요.

여학생은 저녁 예배를 드리러 그 길을 지나곤 했는데, 전 오르간 연습을 하다가도 그 시간이 되면 언덕으로 가 그 여학생이 지나는 걸 바라보았어요.

손수건을 전해주어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었어요.

언젠가는 다가올 그 시간을 아껴두고 싶었거든요.

어느 날 굳은 결심을 하고 그녀를 기다렸어요.

'자두 고마웠어요'라는 말을 수백 번도 더 연습했지요.

라일락 이파리가 잔뜩 두꺼워진 칠월 하순이었는데,

그즈음 그런 말이 유행하고 있었어요.

‘사랑의 맛을 알려면 라일락 이파리를 씹어보라’는.

하지만 라일락 이파리가 어떤 맛인지는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문득 저는 그 맛이 궁금해졌어요.

사랑의 맛이 궁금해졌던 거지요.

손을 뻗어 연한 잎 하나를 떼서 입안에 넣었는데.

아, 그 맛이란!

그건 먹어보지 않고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맛이었어요.

정말이지 죽을 것 같은 맛이었는데 뱉어버릴 수가 없었어요.

그러면 그 기다림이 허사가 되고 말 것 같았거든요.

그때였어요.

멀리 그녀의 모습이 보였어요.

기다림은 그렇게 길었는데 그녀의 걸음은 어찌나 빨랐던지

내가 이파리를 다 씹어 삼키기도 전에 그녀는 내 코앞에 마주 있었지요.

아직도 입안에 가득한 그 맛 때문에 혀가 얼얼하고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해졌지요.

그때 제가 어떻게 한 줄 아세요?

바보 같게도 '라일락 고마웠어요'라고 말하고 말았어요.

어휴, 그렇게 골백번 연습한 말을 두고 라일락이 고맙다니요.”

순진한 아이처럼 귓불이 붉어진 태준을 바라보며 은상은 배를 잡고 웃었다.

“아이고, 도대체 그 이파리 맛이 어땠게요?”

“그건 이 선생님이 직접 맛보셔야 해요.

사랑의 맛이 그런 것이라는 걸 절감하게 될 테니까요.”

그리고 태준은 얼굴을 활짝 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여학생이 어떻게 한 줄 아세요?

절 보며 웃었어요.

제게 눈을 맞추고 소리 없이 빙그레 웃었답니다.“

그 후 그녀는 말 한마디 없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버렸어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은상이

갑자기 생각난 듯 수첩을 꺼내 무언가 끼적이기 시작했다.

“박 선생님,

선생님 곡에다가 그 여학생의 이야기를 담으세요,

그러면 그 소녀와의 사랑을 노래 속에서나마 이룰 수 있지 않겠어요?

제가 가사를 써드릴 테니 곡을 붙여보시겠어요?”

잠시 후 은상은

태준의 고향 추억과 눈앞에 펼쳐진 월포 바닷가의 풍경을 담은 시를 건네주었다.

수첩을 받아든 태준의 눈동자가 따스해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촉촉이 젖어들었다.

“정말 아름다운 노랫말이군요.”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적에

나는 흰 나리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더운 백사장에 밀려 들어오는 저녁 조수 위에 흰 새 뛸 적에

나는 멀리 산천 바라보면서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조수와 같은 내 맘에 흰 새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떠돌 때에는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 동무생각

- 이은상 시, 박태준 곡 - 테너 임정근

- https://www.youtube.com/watch?v=t5NEHFFsXKI

태준은 며칠 전에 작곡한 곡을 떠올렸다.

그 음률 속에서 푸르던 청라언덕과,

언덕의 붉은 벽돌담과 붉은 담을 휘감은 푸른 담쟁이와,

그 길을 장난치며 오르던 형의 얼굴이 떠올랐다.

일본유학 중 폐결핵에 걸려 돌아와 24살의 나이로 그 아름답던 생을 마감했던 형이 떠올랐다.

그리고 창포물을 들인 듯 윤기나던 소녀의 검은 눈썹과,

그 눈썹 아래 싱그럽던 소녀의 미소가 태준의 뺨을 조용히 만지고 지나갔다.

멀리 파도 속으로 백합 같은 소녀의 희디흰 얼굴과 저녁 조수처럼 떠난 흰 새 같은 형의 얼굴이 썰물처럼 밀려왔다가 사라지곤 했다.

어느 시인이 쓴 이 사연을 읽고

나는 그날 내내 가슴이 아프고 슬펐다.

선율 속에 담긴 그의 풍부한 서정성은

당시 우리 민족의 가슴에 맺힌 한을 위로해 주었고

그리움과 애잔함을 달래 주었다 한다.

이 땅의 연인들이여,

“사랑의 맛을 알려면 라일락 이파리를 씹어보세요.

박태준이 말하길,

“아 그 맛이란 정말 죽을 것 같은 맛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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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가곡은 사람의 영혼을 울리고 싶다”라는 인터넷 가곡이야기에서 읽은 글이다.

'최창일' 시인 이 2009-12-08 일자 서울신문에 기고한 칼럼을 인용한 글이다.

박태준, 그는 민족정서를 표현해 낸 우리나라 현대음악 개척의 선구자이다.

“박태준 선생님의 첫사랑은 '동무생각'에서 영원히 숨 쉬고 있다.

나는 왜 그리도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에 마음이 쓰이고 가슴이 아픈 걸까?

사랑!

여느 사람들에게는 일반적인 아름다움이겠지만 나는 아니다.

아프고도 슬프다”

박애란 동료기자가 말했다.

박태준은 대구 계성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숭실학교를 거쳐

미국 웨스트민스터 대학에서 합창지휘를 전공. 석사학위를 취득했고

독립운동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연세대 종교음악과를 설립하고 음대 초대 학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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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글이 감동적이기에 여기 옮겨 실었습니다.)

먼저 요즘 "청라신도시"처럼 "청라"라는 말이 들어간 이름을 자주 접합니다.

처음 "동무생각"이란 노래를 들었을 때, "청라"가 무슨 장소인가 하고 생각했지만,

그냥 지나쳤는데, 오늘 이 글을 읽고는 한글사전을 다시 뒤져보았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사전에서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이은상 시인이 그때 이 말을 만들어서 시에 사용한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담쟁이덩굴의 한자인 "라"(蘿)를, 쉽지 않은 한자를 넣어서 푸른 담쟁이덩굴을

"청라"라고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표현한 셈입니다. 그 노랫말이 꾸준히 노래와

함께 살아남아서 오늘 우리에게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박태준 선생의 첫사랑 이야기는 애잔한 느낌으로 우리에게 감동을 줍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성장의 과정에 처음 느껴본 애틋한 감정의 순간을

제 나름대로 다시 떠올리게 하면서, 잔잔한 하얀 너울이 읽은이의 가슴에

일어나게 합니다.

언제나 첫사랑은, 이루지 못한 것이 첫사랑입니다.

그러니 그 느낌과 애틋함은 오래도록 잊지 못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느낌이 살아있는 한, 우리는 살아있게 될지도 모릅니다.

2021. 0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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